고려시대

고려(高麗)는 태조왕건의 창립(918)후 공양왕(恭讓王)이 이성계에게 정권을 넘겨주기까지 34대 47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해온 왕조이다. 고려는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일국가로 성장하였지만 왕조 초기 있어서는 강대한 호족세력으로 말미암아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고 호족 연합정권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고려 태조초에는 후백제와 신라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신라구영내(新羅舊領內)에는 군소토호(群小土豪)들이 성읍(城邑)에 웅거하여 장군 혹은 성주라 자칭하고 형세를 관망하여 어느쪽이든 가장 유리한 편에 가담하여 그 관직을 받으려는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혁명에 의한 고려 신왕조(新王朝)의 경이적인 출현은 주위대소군웅에 대하여 큰 자극과 충격을 준것도 사실이지만 신왕조가 이들을 어떻게 자기산하로 끌어 들일까 하는 고심과 노력이 대단하였다. 물론 무력에 의한 방법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 평화적으로 회유하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태조는 즉위원년(918)에 각처의 미복속(未伏屬) 지역의 토호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후한 예물과 겸손한 언사의 예로서 회유책과 유화책을 썻던바 과연 이에 호응하여 그들 중에 형세를 보고 신왕조에 귀부(歸附)하는 자도 속출하게 되었다.

상주 하기(풍산) 명주(강릉) 진보(청송) 명지역(이경) 벽진(성주)등의 성주나 장군이 태조3년으로부터 동왕(同王) 8년까지 차례로 귀부하는 자도 속출하게 되었다. 이상이 사실중에서 태조5년에 귀부하여온 진보성주 홍술(洪術)은 지방 호족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서서히 무너지고 호족국가로서 고려조는 새로운 막을 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 태조6년(923) 12월에 진보 홍술은 그의 아들 왕립(王立)을 왕건(王建)에게 보내여 갑옷 30벌을 바치고 전하는 편지에 문소(聞韶)장군 양훤(良萱)은 완전히 후백제 견훤(甄萱)의 휘하로 들어가서 우리들에게 압력을 가하니 만일의 경우 도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양훤은 죽주(竹州)(죽산)에서 궁예를 구박하다가 괴양(槐壤)(괴산)으로 옮겨 신훤(莘萱)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궁예의 휘하에서 쫒기어 나와 문소장군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견훤이 직접 파견한 군사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한다.

왕건은 후백제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문소성을 기반으로 하여서 견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을 짐작하고 정벌하기로 작정하였다.

고려 태조7년(924) 7월에 견훤은 그의 아들 양검(良劒)과 강(康)에게 대야성(大耶城)(합천)과 문소(聞韶)에 주둔시켰던 군사를 모아주면서 조물성(曹物城)(금오산성~금릉군조마면) 공격을 명하였다. 이미 내속(來屬)하여온 문소와 조물성을 동서로 협공하면 왕건의 남진을 막는데 크나큰 효과를 거두게 되고 신라와 왕건과의 내통도 막을 수 있다는 전략에서 취해진 동병(動兵)이다.

이에 왕건도 때를 기다리던중 사세(事勢)를 크게 보고 반격하기도 하였다. 이때 왕건은 중앙에서 애선(哀宣)의 군사를 급파하고 옆에 있던 명지성(命旨城)(인동) 장군 왕충(王忠)에게도 조물성을 도와 지키도록 명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진보성주 홍술에게는 문소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대부분의 군사가 조물성을 치려 떠난후 진보성주 홍술는 미약한 군사로 문소성을 공격하기에 대단한 고전을 치르고 있었다. 조물성 공격에 한달이 넘도록 싸웠으나 많은 사상자만 내었고 군량도 떨어져 후백제의 군사는 퇴각하여 가니 고려 태조는 원군(援軍)이던 왕충과 전사한 애선의 연합군으로 하여금 문소성을 정복하였다.

홍술은 이로서 왕충과 함께 쉽사리 문소성을 점령하였다. 승리를 거둔 홍술은 애선의 유골을 안고 전승 보고차 개경을 찾았다. 이때에 왕건은 홍술에게 문소성을 의성(義城)이라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시키며 홍술을 성주로 삼고 그를 김씨(金氏)로 사성(賜姓)한다고 했다. 이때 진보현(眞寶縣)은 보성부(甫城府)(甫州)로 되었다.

930년 1월에 견훤의 군사는 병산(甁山)(안동~예안간) 전투에서 왕건의 2만 대병(大兵)앞에 대패하고 완산(전주)으로 패주하여 갔다. 이로서 왕건은 북부경북(北部慶北)을 완전수복(完全收復)하니 이로부터 동해안 일대의 성주들은 일시에 왕건에게 항복하여 오니 후삼국통일의 기틀이 서서히 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태조 8년(935)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였으며 후백제를 완전 정벌하여 항복을 받으니 이로서 새로운 통일국가로 고려왕조를 세웠다. 고려건국 초기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 까지 미칠 수가 없어서 지방행정은 각 지방호족들에게 방임된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후 제6대 성종(981~997)때 이르러서야 정권형태를 당의 제도를 본따 유교적인 정치체제로 정비하여 봉건적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고려는 중앙의 3성6부제를 비롯하여 지방에서도 여러 차례의 제도상의 변천이 있었다. 태조 왕건은 건국초기에 지방행정구역을 종래와 같이 부(府) 군(郡) 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해 왔으며 동왕(同王) 23년에는 주 부 군 현이 각칭(各稱)을 서로 바꾸었다.

성종2년에 호족에 대한 통제와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부터였다. 그 12목을 설치한 지역은 광주 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의 12주였는데 이 지역중 대부분의 주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를 해왔던 곳이었으며 그 외관은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수령이었으며 지방관제의 시초였다. 그러다가 왕권의 확립을 보게 된 성종 14년(935)에 종전의 12목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다.

10도는 관내 중원 하남 강남 영남 영동 산남 해양 삭방 패서로서 당의 10도를 모방했던것이며 이 당시 도는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도가 아니라 지방순찰구역으로서 구분되었기 때문에 중앙행정부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중앙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일정한 기간동안 도의 구역을 수행하게하여 10도는 유명무실하였으며 현종이후에는 12주가 개편되여 4도호부 8목이 되었다. 옛날부터 요지이며 풍수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지금의 서울)과 북방에 국경지대에 설치된 양계가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어 전국 군(郡) 현(縣) 진(鎭)을 분담하여 다스렸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3국시대와 같이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된 것이지만 그 실태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와 같이 지방행정구역의 등급이 토지 인구등의 다과(多寡)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신분관계에 따라 결정 되었으니 예컨대 원래는 군현이라 할지라도 정부에 중죄을 받으면 향(鄕) 소(所) 군(郡) 등으로 떨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반대로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우면 보다 높은 행정구역으로 승격되었다.

우리 청송의 지명은 고려 태조원년(918)에 부이(鳧伊)라 칭하다가 후에 다시 운봉(雲鳳)이라 했는데 성종1년(982~997)에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청부(靑鳧)라 개칭하여 예주(禮州)(지금 영덕)의 속현이 되었다. 안덕현은 신라 경덕왕때 연무(緣武)라 개명하여 곡성군(曲城郡)(지금의 안동군 임하면)의 영현을 삼았는데 고려초에 안덕(安德)으로 고치고 현종9년(1018)에 안동에 예속되었다.

송생현도 현종9년(1018)에 예주(禮州)에 속했으며 인종21년(1143)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진보현은 신라때에 칠파화현에서 경덕왕때 진보현으로 문소성 영현에 있었으며 고구려때 조람현을 신라 경덕왕때 진안현으로 고쳐서 야성군영현이었는데 고려 태조7년(924)에 문소군을 의성부로 승격 개칭되어 진보현과 진안현을 합해서 보성부(甫城府)(甫城府~載岩城)로 넘겨주고 있다가 현종9년(1018)에 예주의 속현이 되었다.

충정왕2년(1350)에 왜구가 조직적으로 침략해와 경남일대에 수십차의 침입이 있었다.

우왕2년(1376)에는 황산강(黃山江)(낙동강)으로 침입하여 왔으므로 이 일대에는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때에 진보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피난을 가고 한때는 폐허(廢墟)(空地)가 되기도 하였다.


담당자
문화경제과 남은주
(☎ 054-870-6068)
최종수정일
2016-04-10 11: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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