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국명(國名)으로 조선이라 한 것은 고대로부터 여러시대에 사용하여 오던 명칭이다. 처음 쓰기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는 고기록에 의하여 단군조선이라 하고 다음은 기자가 동쪽으로 우리나라에 와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는 기자조선과 또한 기자의 말왕 준(準) 때에 하북지방에서 망명하여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조선왕이라고 하고 왕검성에 중심으로 한현(韓縣)의 이름으로 국명에서 떨어져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이상의 3개조선(단군 기자 위만)을 고조선이라 하며 이후 낙랑의 치소인 조선현은 고구려 미천왕이 3백 13년에 낙랑을 멸망시키고 평양이라 이름한 후 오래동안 우리의 지리상에서 사라졌다.
그 후 천여년이 지나서 1392년에 이성계가 고려를 대신하여 왕업을 창립하면서 다시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1897년(광무 1)에 고종이 국호를 대한으로 개칭하기까지 505년간 사용하여 왔다.
이성계의 조선왕조를 근세조선이라 불려서 구별한다.
그 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1910년부터 일본인들에게 의하여 다시 조선이라는 명칭을 해방되기 까지 36년간 사용하여왔다.
위화도 회군(回軍)에서 중앙정계의 실권자가 된 이성계는 정치의 지도권을 장악하여 차츰 고려왕조의 구세력을 몰아내고 드디어 신하들의 추재(推載)를 받아 1392년 7월 17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립에 올랐다.
처음에는 급격한 중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국호도 그대로 고려라 칭하였으나 뒤에 곧 조선이라 하여 새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정미즉위수서(丁未即位敎書)에서 의장법제(儀章法制)는 모두 전조(前朝)의 고사에 따른다라고 밝혔는데 조선왕조 제 제도는 고려문물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답습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점점 왕조의 기반이 안정되면서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여타제도의 개편을 이룩하면서 양반관료사회라고 특정 지워지는 국가를 형성하여 갔으나 수차의 대내의 변화와 대외의 대립과 투쟁속에서 갈등과 모순을 내포하다가 한말 을미보호조약의 국권상실의 치욕을 겪으면서 마침내 경술합방의 국치로 27대(519년간)의 조선왕조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중앙관제의 개혁과 더불어 지방제도에 있어서도 여러차례의 변경과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조선초기의 지방제도는 고려시대 중앙행정감독의 편의상 형성된 관행상의 행정구역인 5도양계 대신에 전국을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등 6도와 동북면 서북면의 양면으로 구분하여 6도에는 도관찰사(都觀察使) 출척사(黜陟使)를 동서북면에 도선무찰사(都宣無察使)를 파견하였으며 그밑에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는 목사(牧使) 부사(府使) 지군사(知郡事) 현령감무(縣令監務)를 두었다.
이러한 고려적 행정구획에서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확립코자 하였는데 전국의 행정구획의 정비와 등급을 합리화하는 작업은 부단히 계속되었거니와 태종 13년(1413) 10월에 일부 도명(道名)의 개정과 읍호(邑號)의 명칭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동년(同年)에 평안도 관찰사를 파견하고 태종 16년에는 함길관찰사를 파견함으로서 비로서 8도의 모습들이 갖추어졌다. 원래 도명(道名)은 아마도 소백산맥이나 지리산등 태산으로 구분하는 넓은 구역을 가르키는데 예컨대 큰 고을인 전주와 나주가 있는 대구역 또는 광주나 상주가 있는 대구역을 표시하는 뜻으로 처음엔 전주 라주도 경주 상주도라 부르다가 점차 줄어져서 전라주도 경상주도 다시 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측되며 이런 도명이 공식으로 확립된 것은 태종 13년 10월이다.
경상도는 본래 진한과 변한의 땅으로 뒤에 신라가 이를 통합하여 이른바 신라의 본고장이 되었고 삼국이 통일되어 이곳에 상주 양주 강주 등 삼주를 합하여 경상도를 두었는데 조선왕조에서도 고려때의 명칭을 그대로 부른 것이다. 중종 14년(1519)에 경상도의 사무(事務)가 번다(煩多)하다 하여 좌우도로 나누어 낙동강 이동(以東)은 좌도에 속하고 이서(以西)는 우도에 속하도록 하였다. 동년에 다시 폐(弊)되는 바가 많다하여 파(罷)하여 일도(一道)로 하였다.
선조 25년(159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도로가 통하지 않으므로 또 다시 좌우감사로 나누고 좌도는 경주 우도는 상주에 설치하여 병수사를 절제(節制)하다가 동왕(同王) 26년에 다시 한 도(道)로 합하고 감영을 성주 팔거현에 설치하니 여기는 명의 총병(總兵) 유정(劉綎)이 주진(駐陣)한 곳이었다. 다시 도경(道境)이 넓어 다스리기 어렵다하여 좌우도로 나누었다. 20년 다시 합하고 감영을 달성(대구)에 설치하여 석성(石城)을 쌓았다. 30년에 병화(兵火)로 인하여 또 파(罷)하였다. 31년에 대구와 성주는 도의 중심지이니 전상(戰傷)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므로 잠간(暫間) 안동부에 감영이 머물었다가 삼사(三四)년에 대구로 감영을 옮겨 계속 이곳에 있었다.
영부(領府)1, 대도호부(大都護府)2, 목(牧)3, 도호부13, 군(郡)13, 현(縣)39였다.
고종 33년(1896) 좌우도를 이제의 남북도로 나누어 북도는 도청(道廳)을 본래의 감영자리인 대구에 그대로 두고 남도는 진주에 도청을 두니 북도는 영군(領郡)이 41이요 남도는 영군이 30이었다. 이상이 대체로 조선조시대의 경상도의 연혁인바 이제 본군이 속해 있는 본도를 살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 전체이 행정구역은 1부, 2대도호부 5도호부 3목 14군 41현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의 도표와 같다.
府 | 牧 | 大都護府 | 都護府 | 郡 | 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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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상주 성주 | 선산 | 합천 초계 | 합창 용궁 이경 군위 지례 금산 고령 개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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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창원 | 함안 함양 곤남 | 고성 거제 사천 거창 하동 진성 칠원 산음 안음 삼가 의녕 진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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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진주 | 밀양 | 양산 울산 청도 흥해 대구 | 경산 동래 창녕 언양 기장 장기 영산 현풍 연일 청하 |
|
안동 | 영해 순흥 | 예천 영주 영천 청송 | 의성 영덕 예안 하양 기천 인동 봉화 의흥 신흥 진보 비안 |
다시 동국여지승람(연산군 5년)에 의하면 경상도가 좌우도로 나뉘고 좌우도는 각 3진을 모두 1부 1대도호부 7도호부 3목 14군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區分 | 鎭 | 府 | 牧 | 大都護府 | 都護府 | 郡 | 縣 |
---|---|---|---|---|---|---|---|
左道 | 경주 | 경주 | 울산 양산 영천 흥해 | 동래 청하 영일 장기 기장 언양 | |||
안동 | 안동 | 영해 청송 | 예천 영주 풍기 | 의성 영덕 봉화 진보 군위 비안 예안 용궁 | |||
대구 | 대구 밀양 | 청도 | 경산 하양 인동 현풍 의흥 영산 신녕 창녕 | ||||
右道 | 상주 | 성주 상주 | 선산 | 김산 | 개녕 지례 고령 이경 함창 | ||
진주 | 진주 | 합천 초계 함양 곤양 | 남해 거창 사천 삼가 의녕 하동 산음 안음 단성 | ||||
김해 | 김해 창원 | 함안 | 거제 고성 칠원 진해 웅천 |
“증보문헌비고”
여지의 군현연혁에 의하면 정조 32년에 부 목 군 현의 호를 모두 고쳐서 8도를 23부로 하였는데 23부중 경상도에 속하는 진주 동래 대구 안동의 4부의 속현은 다음과 같다.
府 | 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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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 진주 | 진주 고성 진해 사천 곤양 남해 단성 산청 하동 거창 안의 함양 합천 초계 삼가 의녕 칠원 함안 웅천 김해 창원 |
동래 | 동래 양산 기장 울산 언양 경주 연일 장기 흥해 거제 | |
경상도 | 대구 | 대구 경산 칠곡 인동 성주 지례 고령 선산 개녕 김산 의성 군위 비안 밀양 청도 영천 현인 신녕 하양 창녕 영산 현풍 |
안동 |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덕 영해 청하 영천 예안 봉화 순흥 풍기 함창 용궁 예천 상주 |
고종 33년(1896)에 구제도(舊制度)로 복구할 때 다소의 변경이 있었으나 경기 강원 황해 이외의 도는 모두 남북도로 나누어 13도로 하였다.
조선조가 개국되었을 때 오늘의 송생(松生)영역에는 청송(青松)과 진보현(眞寶縣)이 주현으로 있으면서 태조 3년(1394)에 진보현과 송생현을 합(合)하고 세종 즉위년(1418)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탄생향(誕生鄕)이므로 청보군(青寶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다가 후에 다시 진보를 분리하여 감무를 두었다.
세조때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후 변천을 거쳐 1895년에 군(郡)이 되고 1914년에 진보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