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이후

36년간 민족의 문화와 얼이 송두리째 사라졌던 길고 긴 과정에서 새로운 탄생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면서 우리의 민족은 피눈물 나는 필사의 노력으로 조국애와 민족애의 정열을 발휘하여 조국광복을 염원하면서 저항하고 투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못내 아쉬워 함은 나라의 광복이 2차세계대전이란 흐름속에서 연합국의 승전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2차세계대전중인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을 1945년 7월에 포스담선언에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한 일본에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시킨다는 원칙을 선언하였을 뿐 일본이 항복한 후 우리나라 독립의 구체적인 절차는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2차대전이 끝났다. 동년 12월 15일부터 27일 사이에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상들은 모스크바회의에서 패전국 일본의 문제를 토의하는 가운데서 한국독립의 구체적인 절차를 결정지었다. 이것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면 최장 5년동안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신탁통치하에 둘 것을 합의하여 그 준비를 위하여 현지에서 미소 주둔군사영관을 2주일내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국내의 여론은 민족주의진영에서는 적극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미소공동위원에 서는 소련측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들은 장차 정부수립될 임시정부에 배제할 것을 주장하고 미국측은 찬성 반대를 막론하고 모두 참가시킬 것을 주장하여 결국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이미 미국정부는 한국문제를 UN에 제기하기로 결정하고 10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단은 UN에서 한국문제의 토의가 끝날때까지 휴회할 것을 제의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가 독립정부구성을 위하여 설치한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소련측은 자기들의 점령지인 38도선 이북은 동위원단이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동년 2월 유엔총회는 한국문제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가능한 지역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가결하였으나 소련측은 이 결정을 배제하였다. 유엔은 이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가능한 38도선 이남지역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이로서 제헌국회가 구성되어 5월 31일 개회하였는데 초대국회의장에는 이승만이 당선되였다.
6월 10일 국회법을 통화시키고 7월 1일에 국명을 대한민국이라 할 것을 가결하였던 것이다.

7월 12일 국회는 대통령 책임제 단원제 헌법을 통과시키고 7월 14일 정부조직법을 통과시켜서 7월 17일 헌법 정부조직법 공포식을 거행하였으며 7월 20일에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여 24일에 취임식을 하고 8월 15일 조국해방기념일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소민족이 겪어야만 하는 38선이란 국토분단의 비극으로 체제가 다른 민족의 벽은 굳어져만 가고 있는 슬픈 사연을 간직한채 평화통일이란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정부수립후 동족상쟁의 6․25를 겪고 참혹한 전화속에서 사회는 정치 경제의 혼란이 가중되고 이승만자유당 정권은 장기집권의 야욕이 4․19 학생의거로 무산되고 민주당정권이 잠시집권하였으나 휴전하의 어려운 여건밑에서 우리의 나갈길을 힘차게 이끌어 주지 못하였다. 그 결과 우리 역사상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국토수호에 전념해야할 군인이 나라를 걱정하여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못되나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있었고 남북이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사회전반에 걸쳐 제모순(諸矛盾)을 타파코자 일어서게 된 것으로 그 후 2년간의 군정을 거처 1963년 12월 17일자로 종식되고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3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구악일소(舊惡一掃) 기강확립 민족정기 앙양 국민생활의 향상 공산침략의 저지 민족국가의 재건등을 다짐하면서 과감한 사회개혁과 정치풍토를 개선하였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힘차게 추진하였다. 민족의 얼을 찾기 위한 문화재의 복원과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제창과 실천 인력과 기술의 중동지구진출 우리상품 세계경제시장진출 등 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여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축소시켰으며 남북통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론의 통일과 국방의 배양을 목표로 정책화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은 장기집권을 위한 비민주적 요소가 많았으므로 각계에서 비판과 지탄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정국이 어두어지고 불안한 사회풍조가 조성되어 시위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리하여 헌법에 의거하여 최규하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고 통일주체국민대의원회의에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1979년 12월 21일에 취임하여 잠정적인 위기관리정부에서 1980년 8월 16일 하야(下野)하고 뒤이어 국가보위배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인 전두환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구체적인 유신헌법의 개정을 단행하여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로서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 헌법에 의하여 선거인단의 투표로서 전두환대통령을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1년 3월 1일에 제5공화국이 출범되었다.

5공화국 전두환대통령은 중임을 피하고 단임 임기로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실천할 것을 국민에게 천명하였다.

민주정의당은 1인장기집권의 피해가 재발하는 것을 막고 권력의 분산을 촉진하며 사회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비교적 고르게 반영한다는 의원내각제개헌안을 내놓았으나 국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분노가 폭발한 6월의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에 접어 들자 민주정의당은 노태우후보는 어떠한 명분과 어떤한 힘도 이땅에 권위주의체제를 되살릴 수 없고 되살리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권위주의체제의 종언과 민주주의시대의 개막을 다짐한 우리 헌정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 6․29선언을 하게 이르렀다.

이 선언으로 헌법개정을 단행했으며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93.1%의 높은 찬성을 받아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민주정의당소속후보가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제6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우리의 청송은 나의 고장이며 나의 고장은 나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공간이다. 나의 생활이 중요한 만큼 그 터전도 소중한 것이다. 이 터전은 조상으로부터 물러받은 우리의 재산이며 이를 소중히 가꾸어 다시 후손들에게 물러 주어야할 보배로운 곳이다.

이 고장은 일찍이 조상들이 주왕산 절경아래 터전을 열고 구비치는 낙동강의 원류를 따라 문화를 꽃피우고 삶을 가꾸어온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우리 조상들이 온갖 지혜를 모아 자연에 도전하면서 삶을 다음어온 발자취를 교훈 삼아 우리 모두 사소한 일에도 정성과 힘과 슬기를 모아 활기찬 내일의 청송을 다지고 있다.


담당자
문화경제과 남은주
(☎ 054-870-6068)
최종수정일
2016-04-10 11: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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