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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병

국가가 위난을 당해서는 목숨을 내놓는것이 도리 왜란 호란 구한말 등 혁혁한 전공 순절한 인사 허다

청송(靑松)은 전국에서 의병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의병사에 있어 정신적인 선각자들의 연고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선생의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퇴계(退溪) 선생의 본향이 청송의 진보(眞寶)이고, 의병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임란 초에 퇴계(退溪), 남명(南冥) 두 선생의 후학을 의병으로 동원하여 진주성을 사수한 학봉(鶴峯) 선생의 태지향이 청송의 안덕(安德)이요, 의병승장(義兵僧將) 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또한 주왕산 대전사에서 의병을 훈련하였다.

이러한 토양위에서 청송의 선비는 평시에는 수신제가(修身齊家) 하다가 나라가 부르면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 있으면서 고을을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때는 모름지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충의보국의 일념으로 힘이 다할때까지 처절하게 항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양란 시 청송지방의 항전사

1592년 시작되어 7년 동안 조선의 온 국토를 유린한 왜란에 청송인들은 참여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우리 청송우국지사들은 국가가 왜구의 침략을 당하여 종묘와 사직이 위급함을 알고 비록 우리 청송은 직접 왜구의 병마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나 오직 우국애정이 불타 많은 지사들은 의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공도 허다하며 군량과 병기보급에 공헌한 자도 허다하다." <청송군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세한 기록이 없어 전투에 참여한 정확한 명단이 없으며 또한 확실한 군량군기보급물량을 상고할 길은 없으나 다행하게도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의 임란일기(壬亂日記)와 영천(永川) 권응수(權應銖)의 임란동고록(壬亂同苦錄)과 지악(芝嶽) 조동도(趙東道)의 화왕산회맹록등(火旺山會盟錄等)이 있어 이를 상고하여 대략 당시 의진에 참진하여 순절하고 또 공을 세운 분들과 보급에 공이 있는 분들을 기록하고 있다." <청송군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의진에 참여한 의병
조형도(趙亨道), 남윤조(南胤曺), 조동도(趙東道), 권준(權晙), 신지남(申智男), 권소(權昭), 안윤옥(安潤屋), 권완(權), 김사형(金士亨), 권의립(權義立)
영천 권응수(權應銖) 의진에 참여한 의병
김몽린(金夢隣), 김몽구(金夢龜), 김몽기(金夢麒), 김성원(金聲遠), 김성달(金聲達), 김몽룡(金夢龍)
독자 기병한 의병
손응현(孫應峴), 심정(沈汀), 서사원(徐思遠), 서사술(徐思述), 이응의(李應義), 이정백(李庭柏)
단신항왜하다가 순절한 의병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이상 3형제), 신예남(申禮男)
기타의진에 참여한 의병
이홍중(李弘重), 최충손(崔忠孫), 최응삼(崔應參)
군관에서 참전한 의병
심정(沈,汀 ), 심호(沈湖), 장후완(蔣後琬), 정운(鄭雲)
보급에 유공한 의병
심청(沈淸)(본군에서 동래까지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음.)

병자호란 당시 청송의진 항전사

1636년 청군의 침입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청송에서 의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인사와 수절인사로 군내에서 전란을 피하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많은 인사가 있었다.

쌍영순절자(雙嶺殉節者)
윤충우(尹忠祐) - 병자순절록 참조
권일력(權日력(王+力) : 쌍영전투( 雙嶺戰鬪) 중 마상(馬上)에서 전사하니 승마(乘馬)가 천리길을 그 시신(屍身)을 실고 반시(返屍)하니 세칭의마(世稱義馬)라 하였다.
기타창의자
심예달(沈禮達), 황충일(黃充一)
수절인사(守節人士)
고응섭 : 벼슬자리에 있다가 난이 일어 남에 현동면 월매리 단서굴(丹書窟)에서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고 굴명을 대명굴(大明窟)이라 하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음.
신기(申機) 김몽추(金夢鰍) : 정묘호란에 전공이 있음.

구한말 의병활동

1895년 10월의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시행을 계기로 하여 개항이후 축적되어온 반일감정이 반일 의병투쟁으로 바뀌면서 청송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1896년 청송의진, 진보의진, 산남의진이 청송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구한말 의병활동

청송의진

 감히 칼날을 밟으라 한들 사양할 수 있으랴 - 김상길의 창서사 - <적원일기 1896년 3월 17일(음 2.4)> 적원일기 - 청송의진의 진중일기

청송의진은 참여 인원의 면모나 전력, 활동면에서 볼 때, 한말 청송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진이다.

청송의진은 1896년 3월 12일(음력 1월 29일) 결성되어 16일에 창의를 천명하였다. 1896년 1월 16일(음력 2월 3일)에 창의한 안동보다 두 달 늦게 일어났던 것이다.

1896년 3월 초에 청량산의진과 안동의진으로부터 격문이 청송에 도착하였고, 특히 안동의진의 소모장 류시연(柳時淵)이 3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청송에 들어와 군사를 모으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효원(徐孝源), 심관지(沈灌之) 등의 주도하에 100여명의 유생이 모여 3월 10일(음력 1월 27일) 향회를 열고 의진 결성을 결의하였다. 향회 개최에 즈음하여 부동면 상평의 서효원은 각 면으로 '효유문'(曉諭文)을 보내 "위로는 대의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아래로는 고을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하면서 향회 참석과 의진 결성을 촉구하였다.

청송의진이 창의시 표방한 두 가지 목표는 곧 국권 수호의 '위국거의'(爲國擧義)와 향촌사회 보호의 '자수지계'(自守之計)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향회에 참석한 유생들은 심성지(沈誠之)를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고, 조성규(趙誠奎)와 권복규(權復奎)로 하여금 편제와 임원을 기록한 '임파록'(任爬錄)을 작성토록 하여 각 부서의 책임자를 정하고 참모와 서기를 뽑았다. 그리고 3월 16일(음력 2월 3일) 비로소 창의를 천명하는 대장기를 세우고 남천 백사장에서 첫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3월 17일(음력 2월 4일) '축사'(祝辭)와 '창서사'(唱誓辭)를 지어 창의의 정당성을 널리 밝히고 천지신명께도 전도를 축원하였다.

청송의진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관군의 추적과 고종의 해산칙유에 따라 5월 25일 본진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까지 외방장을 중심으로 하는 면군체제하에서 활동을 지속해갔다는 점이다. 면군체제는 군사적 활동 외에 외방장 아래 이속과 서기 등 행정 담당 요원과 면임과 집강 등 향촌사회의 유지들의 협조하에서 혼란기의 행정치안의 공백을 메꿔주는 역할도 한 것이었다.

청송의진은 창의 후 주변의 안동, 진보, 선성(宣城), 영양, 의성, 영덕 의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 등과 긴밀한 협조하에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혹은 연합부대를 편성해 활동하였다. 그 결과 5월 14일의 감은리전투, 6월 17일의 경주성전투, 7월 11일의 영덕전투, 7월 하순의 화전등전투 등 청송의진이 수행한 대표적인 전투들은 모두 다른 지역 의진들과 유기적인 관계하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해 이루어졌다.

진보의진

청송의진과 더불어 전기의병 시기에 오늘날의 청송군 관내에서 활동했던 부대로 진보의진이 있었다. 이 의진은 방산(舫山) 허훈(虛薰)이 1896년 4월 7일(음력 2월 25일)경 편성한 부대였다. 대학자이기도 했던 허훈은 저명한 의병장인 왕산 허위의 형으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란을 피해 진보에 은거하던 중 의병을 일으켰다.

진보의진은 창의후 어천, 남면 화마리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 청송, 영양, 의성 등 주변 의진과 정보를 교환하며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5월 14일 감은리전투 후 진보의진은 영양, 청송의진과 합세하여 의성의진을 응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안동의진의 배후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산남의진

후기의병 시기에 청송지역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부대는 인근의 영천에서 편성된 산남의진이었다. 이 의진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청송을 비롯하여 영천, 영일 일대에서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최세윤(崔世允) 의병장이 이끌었던 부대이다.

청송지역의 인사들은 산남의진이 처음으로 편성되던 1906년 봄부터 여기에 참여하였다. 서종락(徐鍾洛)을 비롯하여 남석우(南石佑), 김태언(金泰彦) 등 50여명이 가담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서장으로 추대된 인물은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좌포장 이세기(李世紀) 등이었다. 그뒤 1907년 4월 청송지역에는 남석인(南錫仁), 이세기, 그리고 정순기와 이종곤 등이 연이어 파견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고,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에는 우재룡(禹在龍)과 김성일(金誠一) 등 수십명의 진위대 군인들이 청송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에 들어감으로써 전력이 크게 보강되었다.

산남의진은, 1906년 5월 피체 후 1906년 4월 석방되어 활동을 재개한 창의장 정용기를 주축으로 1907년 8월에 편제를 개편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산남의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청송인으로는 선봉장 홍구섭과 후봉장 이세기를 비롯하여 유격장 임용상, 장영집사 김진영(金震榮) 등이 있었다. 나아가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청송지역에는 산남의진의 유격대가 편성되었고 그 유격장에는 김진영이 임명되었다.

청송지역에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산남의진의 별진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청송의 동부는 서종락이 지휘하며 주왕산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청송의 서부는 남석구가 지휘하며 철령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청송면 안덕 출신인 서종락의 휘하에는 중군 우영조(禹永祚), 도총 오상영(吾相泳), 참모장 심일지(沈一之), 소모장 윤용식(尹龍植) 등으로 진용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석구 부대의 진용은 그 전모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대체로 현동면 등지에 세거하던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남의진의 청송 별진은 주왕산을 중심으로 청송읍과 부동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다. 산남의진의 본진은 최세윤 의병장이 1908년 7월 체포된 후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송지역은 서종락과 남석구 등의 부대가 유격전을 계속하였고, 이세기는 본진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동대산을 중심으로 1909년까지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후 서종락, 김사곡, 윤상촌 등의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거나 귀순함으로써 청송지방의 산남의진 잔여세력은 점차 해산되어 갔다. 그뒤 산남의진의 청송 별진은 1910년 부남면의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자
사회복지과 서유진
(☎ 054-870-6160)
최종수정일
2021-01-11 15:16:45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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